비극

《 페룸티나 전쟁 》

 

대범람의 소식은 대륙 전체로 퍼지게 되었다.

 

라이베리아 대사는 본국으로 철수해버렸고, 그와 동시에, 거대한 파도가 제노바를 덥쳤다.

 

사실 이 재앙과도 같은 파도는 사실 예정되어 있던 것이었다.

 

 

 

그날은 일식의 기사단이 창설되고 아엘가르가 부단장이 된 지 1년이 겨우 넘어간 날이었다.

 

아엘가르는 4일 뒤에 있을 첫 휴가를 고대하고 있었다.

 

8년만에, 세링텐으로 돌아갈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변화는 그녀의 4일을 기다려 주지 못했고, 그날 저녁, 제국의 선전포고와 함께 야간 기습이 시작되었다.

 

로메르트에 있는 모든 기사단의 단장, 부단장은 그 즉시 소집되어 제국군에 대항하라는 교주의 명령을 받았다.

 

 

 

아엘가르는 억울했다.

 

 

 

세상이 그녀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어렸을 적 세링텐에서 있었던 불운과 다르지 않았다.

 

 

 

" 세링텐은 안전하다. 주민들은 무사하니 이제 어리광부리지 마. "

 

 

 

회의에 소집된 인노첸시오는 그녀에게 딱 잘라 말했다 

 

그녀는 심문관의 말을 듣고도 마음속으로 수백번 세링텐으로 돌아갈까를 고민했으나 곧 단념했다.

 

 

 

그녀는 어쨋거나 기사였고, 아리엔의 부관이었다.

 

그녀는 책임을 다 할 의무가 았었다.

 

도망친 기사가 되어 세링텐으로 돌아간다 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일식의 기사단이 하달받은 임무는 단순했다. 

 

 

' 밀레투스 산맥을 넘어오는 적들을 섬멸하라. '

 

 

기사단은 그 길로 밀레투스 산맥으로 향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사실은, 밀레투스 산맥에서 살아 돌아온 기사단은 없다는 것이다.

 

 

 

 

" 여긴 굉장히 춥구나... 세링텐도 이렇게 추워? "

 

 

금빛 갑옷을 입은 아리엔이 물었다. 

 

 

" 아니, 여긴 고지대니까. 고향보다 조금 더 추운거 같네. "

 

 

" 으으... 난 이렇게 추운게 싫더라. "

 

 

 

기사단은 밀레투스 산맥에서 큰 피해를 입은 우르비노의 기사수도회를 도와 산맥을 돌파하려는 제국군을 상대로 선전하고 있었다.

 

많은 병사들이 북부의 추위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많이 죽어나갔지만, 죽음은 전장에서 곧 익숙해졌다.

 

정작 아엘가르 본인만 해도 세링텐에서 얼어죽은 사람들은 많이 보아왔으니.

 

처음에는 진짜 사람은 베고, 마법으로 구멍을 내는 광경이, 감촉이 너무나도 끔찍하게 느껴젔지만 말이다.

 

 

" 저 너머가 세링텐이야. "

 

 

" 저어기가 네 고향이구나... "

 

 

 

기사단은 밀레투스 산맥 서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보다 더 서쪽에는 세링텐 마을이 있었다. 

 

 

아엘가르의 고향, 기사가 된 이유.

 

 

아엘가르는 매마른 나무들이 가득한 눈덮힌 산맥을 바라보았다.

 

다음 고지만 점령한다면 어쩌면... 세링텐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상대는 대륙 최고의 지상군을 자졌다고 평가되는 바이에른의 원정군이었다.

 

 

 

" 가르, 너무 걱정하지 마. 척후대가 정찰해 봤는데, 주민들은 무사하대. "

 

 

" ...그래. 고마워. "

 

 

 

가르는 아리엔의 뒤에서 그녀를 따랐다.

 

이번 작전지는 오래전에 얼어붙은 폭포가 있는 거대한 골짜기였다.

 

마족전쟁 당시 샤한샤의 친위대와 천사들이 격돌했던 그 장소는 천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후 또다른 전쟁의 무대가 되어있었다.

 

 

 

" 경치는 장관이네. "

 

 

 

아리엔과 아엘가르가 이끄는 선발대는 골짜기에 연결된 다리를 끊고 그 아래로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절벽을 기어내려와 골짜기를 직접 돌파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탓일까? 

 

골짜기 아래에는 버려진 군수품 상자를 제외하면 제구군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방심하고 있는 적들을 기습공격해 쉽게 고지를 차지하고 반격의 기회를 잡을 수 있을 터였다.

 

 

 

상황은 이상적으로 흘러갔다. 

 

 

 

골짜기 너머로 올라와 몇 km를 더 나아갔을 때, 공성무기를 운반하고 있는 제국 공병대와 호위부대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아엘가르와 아리엔은 술술 풀리는 상황에 함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재로 돌아가면 저 흉악한 발리스타가 골짜기 너머로 운반될 것이 너무 명확하게 보였다.

 

 

 

기사단 소속 마법사의 신성마법을 시작으로, 기사단은 제국군과의 본격적인 전투를 시작했다.

 

아무리 대륙 최강의 군대라 할지라도 갑작스러운 마법 공격과 기습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는지, 제국군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몇차례의 공세가 이어지고, 기사단은 발리스타를 파괴하고 적들을 몰아내는 대에 성공했다.

 

 

 

완벽한 승리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길어진 무리한 작전으로 복귀 예정일은 한참 지나있었다.

 

그에 따른 징계를 감수해야 하겠지만... 무슨 상관이겠는가.

 

우리는 승리했고, 이제 세링텐으로 돌아갈 수 있다.

 

 

 

기사가 되어서 돌아온 자신을 보며 세르게이는 무슨 표정을 지을까?

 

이렐르는 또 얼마나 컸을까?

 

하지만 우려하던 현실은 조용하게 나타나 그녀를 옥죄여오기 시작했다.

 

 

 

" 왜 눈이 검은색이지? "

 

 

 

한 병사가 중얼거렸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밝았던 하늘에는 어느 순간 잿빛 가루들이 휘날리고 있었다.

 

원래도 어두웠던 숲에는 더 짙은 그림자와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 멀리, 아니, 가까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나무들 사이에, 그림자 속에.

 

검은 손을 가진 한 사내가 서 있었다.

 

 

 

《 일몰 》

 

" ...! "

 

 

" 누구냐?! 신원을 밝혀라! "

 

 

날카로운 아리엔의 외침이 사내에게 향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도 사내는 저편에서 자신에게 시위를 겨눈 기사단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는 허리에 군도를 차고, 검은 체복을 입고 있었다. 

 

어께에 달린 견장과 특징적인 군모.

 

얼굴을 가리고 있는 두건.

 

 

 

아리엔의 칼 끝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그에게는 소속을 알려주는 인장도 없었다.

 

한번도 알려지지 않은 문양이 그려진 견장만이 재와 함께 마람에 나부낄 뿐.

 

 

 

그 누구도 나서지 못했다.

 

숲 속에서의 숨막히는 대치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사내였다.

 

 

 

" ... 하찮은 장난질에 속은 머저리들이 줄줄히 몰려왔구나. "

 

 

 

그는 유창한 카스트어를 구사했다.

 

그의 기계적이고 낮은 목소리는 마치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 선명했다.

 

 

 

아리엔은 망설이지 않았다. 

 

 

 

곧이어, 수많은 화살이 그에게 쇄도했다.

 

하지만 궁병들이 발사한 화살들은 그의 가벼운 손짓 한번에 거은 재가 되어 하늘에 흣날리는 먼지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 와라, 이스테리아의 똥개들아. "

 

《 검은 손 》

 

 

아엘가르의 손은 이미 한계였다. 

 

검을 잡고 휘두르기는 고사하고, 들고 서 있기도 힘들었다.

 

일반 병사들은 이미 이 싸움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퇴각하거나 사내의 무차별적인 공겨에 바스라진 후였다.

 

 

 

" 금빛 광택이 흰 날개의 사자를 비추니... "

 

 

" 질긴 자식! "

 

 

"  ...불길이  대지를 달구었다! "

 

 

 

아리엔의 영창과 함께, 거대한 화염 구체가 그녀의 검에서부터 형성되더니, 무서운 속도로 사내를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내는 보통의 전사가 아니였다.

 

거대한 화염 구체는 그의 검은 손에서 나온 정체불명의 힘에 굉음을 내며 사그라들었다.

 

 

 

아무런 영창조차 필요하지 않은데에도 저런 힘을 남발할 수 있다니.

 

하지만 아리엔의 공세는 끝난 것이 아니였다. 

 

사그라든 구체 안에서, 붉은 점이 일순간 폭발하며 사내의 중심을 흐트러놓은 것이다.

 

 

 

숙련된 검사는 이 순단을 놓치지 않았다.

 

아엘가르는 이미 한계까지 도달해 붉은 살점이 너덜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사내에게 돌진했다.

 

 

 

" 으아아아아악!! "

 

 

사내가 그녀의 공격을 흘릴 틈도 없이, 그녀의 긴 검이 그의 복부를 관통했다.

 

그의 복부에 검을 박아넣은 채로 크게 휘두르자, 정체불명의 사내는 몸이 거의 반으로 잘린 채 비틀거리다 뒤로 쓰러저버렸다.

 

 

 

" 아엘가르, 괜찮-! "

 

 

 

아리엔이 완전히 지쳐 그 자리에서 쓰러질 뻔 한 아엘가르를 부축하게 위해 다가간 그 순간, 나무 타는 냄사를 풍기는 쇳소리와 함께 쓰러진 사내에게서 부터 검붉은 에너지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은 주변 숲은 초토화시키고, 대지를 흔들어놓기 충분한 위력이었다.

 

아엘가르는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멀리 날아가 그대로 나우에 박혀 기절하고 말았다.

 

《 오... 》

 

아엘가르는 뜨거운 폭발음에 깨어날 수 있었다.

 

한쪽 눈은 심하게 다친 것인지, 떠지지 않았고 시야는 전부 붉었다.

 

오른쪽 다리는 왼쪽으로 심하게 꺽여 있었다.

 

 

 

아무래도 다리뼈가 박살난 듯 했다.

 

멋대로 감기는 눈동자에는 방금전의 그 사내와 그와 정확히 똑같은 복장, 똑같은 힘을 쓰는 사내 둘이 아리엔과 싸우고 있었다.

 

 

 

아리엔이 밀리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을 터였다.

 

아엘가르는 다리를 일으켜보려 했지만 그녀의 몸은 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찢어질 듯한 고통과 두려움에 그녀는 눈을 감고 소리질렀다.

 

 

" 으아아아아아아악!! "

 

 

그녀의 머릿속에서 그녀와 닮은 누군가가 속삭였다.

 

 

" 포기해! "

 

 

" 넌 나다! "

 

 

 

그녀는 붕괴에 잠식되고 있었다.

 

그 두려움에 그녀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계속해서 소리쳤다.

 

 

 

그럴수록 목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그래, 저 목소리의 주인과 손을 잡아보자.

 

그렇다면...!

.

.

.

목소리가 그녀를 완전히 집어삼킬 때 쯤, 온화한 목소리가 그녀를 안심시켰다.

 

 

" 괜찮아, 괜찮아... "

 

 

아엘가르는 눈을 떳다.

 

자신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정확히는, 자신을 업은 아리엔이 힘겹게 나아가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건지 알 수 없었다.

 

 

 

" 음, 깻어? "

 

 

 

아리엔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했다.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 처럼.

 

신나게 놀고 함께 숙소로 돌아오던 축제날처처럼.

 

 

 

해가 지고 있었다.

 

그래, 그 망할 해가 지고 있었다.

 

 

 

아리엔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가르를 업은 채 만신창이 된 몸을 이끌로 해가 지고 있는 지평선으로 달렸다.

 

뒤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아앨가르는 방금 전의 그 사내들이 자신들을 뒤쫓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 가르, 내 말 잘들어. "

 

 

아리엔은 아엘가르를 물가에 내려놓고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그녀를 작은 나룻배에 올리며 말했다.

 

 

 

" 꽉 잡아. 이대로 바람을 일으켜서 날릴거니까. 어릴 떄 많이 했잖아. 기억나지? "

 

 

 

가르는 나룻배에 힘 없이 누워 어지러운 시야를 다잡으며 아리엔을 바라봤다.

 

그녀의 배에는 큰 상처가 나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 안...돼... "

 

 

 

가르는 아리엔이 무엇을 하려는지 곧 이해할 수 있었다.

 

아리엔은 나룻배에서 기어나오며 필사적으로 자신의 손을 붙잡는 그녀를 따듯하게 안아주고 속삭였다.

 

 

 

" 미안해 가르. 도망쳐. 멀리. "

 

 

 

짧은 영창과 함께, 거대한 괴음과 함께 가르응 태운 나룻배는 물길을 따라 무서운 속도로 저 멀리 떠내려갔다.

 

아엘가르는 아리엔의 마지막 말이 무엇으로 부터 도망치라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 플레어 》

 

" ... 왔구나. "

 

 

아리엔은 멀어져가는 가르를 보며 일어섰다.

 

정체불명의 습격자들이 자신의 등 뒤에서 검을 겨누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오늘 죽을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후회하지 않았다.

 

불쾌한 증기소리가 들려왔다. 

 

 

 

- 치이이익 -

 

 

 

" ... 대단하군 라이베리아인. 분명 폭발에 맞아 테인티드가 되었을 텐데, 들었던 바와 달라. "

 

 

" 너희는... 황제의 검이구나. "

 

 

" ... 교단에게 버림당한 꼴이라니. "

 

 

 

아리엔은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올렸다. 

 

과도한 출혈, 그리고 오랜 싸움으로 완전히 탈ㅈㄴ한 그녀의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 너희도 같은 마음이구나. "

 

 

 

자신 앞에서 검을 견고 있는 검은 사내는 애써 상처를 숨기기 위해 애쓰고 있었지만, 몸에 난 구멍과 조금씩 떨리는 그의 군도는 그가 이미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잘 알려주고 있었다.

 

 

 

 " 다 함께 사는 방법은 정말 없을까? "

 

 

" ... 뭔진 몰라도, 전쟁은 아니였을거다. "

 

 

" ... 그래. "

 

 

 

어쩌면, 공존은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선택지였을까.

 

애초부터... 교단은 타협을 선택지에 두지 않았던 걸까.

 

아리엔은 죄책감을 느꼈다.

 

-

 

가르, 정말 미안해.

 

 

 

너에게 이런 짐을 지게 해서 미안해.

 

 

너에게 해주지 못한 것이 너무 많아.

 

 

하지만 가르, 슬퍼하지 마.

 

우린 다시 만나게 될거야.

 

 

어떤 형태로든, 어떤 방식으로든.

 

 

너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잘가.

 

 

 

아리엔의 상처 사이로, 밝은 빛이 뿜어져나왔다.

 

그리고 곧, 거대한 폭발과 함께, 두 전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